중세시대 교회
교회와 봉건귀족은 유한 지배계급으로서 노동하는 사람들에 의해 부양되었습니다. 이들은 농민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농민의 수확에서 세금을 거두는 것을 당연시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당연히 그런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하는데, 즉 교회는 민중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고 내세를 보장해 주며 봉건귀족은 현세의 삶을 안전하게 보호해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 민중의 두 ‘보호자’는 민중으로부터 얻어낸 이득을 나누는데 서로 경쟁관계에 있었습니다.
봉건귀족과 교회는 경제적 이익을 둘러싸고 힘을 겨루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가 한겨울 눈밭에 엎드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파문을 철회해 달라고 빌었던 카노사의 굴욕(1077년)은 세속 봉건권력이 교회권력에게 굴복한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사건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지속적으로 숭리를 거둔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세 말 교황권이 약해지자 프랑스의 필리프 4세는 십자군 원정을 통해 막대한 치부를 한 성당기사단을 이단과 동성연애 혐의로 고발하여 전격 체포하고 그들이 보유한 재산을 몰수했습니다. 그러나 중세시대 교회와 봉건귀족이 벌인 힘겨루기에서 대체로 교회가 우위를 차지했습니다. 왕을 비롯한 공작이니 백작들은 끊임없이 서로 충돌했고 이들이 싸우는 틈을 타서 교회는 어부지리를 취했습니다.
사실 카노사의 굴욕도 하인리히 4세와 다른 제후들간에 정치적 알력이 없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속적인 세력과 달리 교회는 교황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조직되어 있었고 영지 관리도 훨씬 잘했습니다. 성직자들은 결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재산 분할이나 상속 분쟁이 일어날 염려도 없었습니다.
11세기경 경제적 여유와 문화적 역량을 갖춘 유일한 주체는 수도원이었습니다. 토지가 부의 원천인 시대에 수도원은 대토지를 소유한 영주로서 문화와 예술을 주도했습니다. 성당 건축은 수백 명의 석공과 목공, 천 명 이상의 막일꾼이 필요한 대공사로 부유한 수도원만이 벌일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제후들은 종교 세력의 지지를 얻기 위해, 혹은 개인적인 영혼 구제를 위해 수도원에 토지를 헌납했습니다. 제후들은 전쟁에서 저지른 잔인한 행위를 속죄하기 위해 수도원에 듬뿍 기부를 했고 좀 심한 짓을 저질렀다 싶으면 수도원을 아예 통째로 봉헌하고는 다음 전쟁을 위해 숨 가쁘게 달려 나갔습니다.
제후 사이에 무력분쟁이 일어나면 교황이 중재에 나서서 ‘아무개 백작은 수도원에 성당을 지어 바치시오’하고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여, 한때 프랑크 왕국 영토의 3분의 1이 교회 소유였고, 10,000헥타르 이상 되는 장원을 가진 수도원도 있었습니다.
파리의 생제르맹 데프레(Saint-Germain-des-Pres) 수도원은 여러 지역에 있는 수백 개의 장원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총 면적이 34,000헥타르나 되었습니다. 당시 영주들이 평균 60 내지 180 헥타르의 영지를 가지고 있었으니 수도원의 재산 규모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교나 대수도원 원장은 봉건제도 내에서 백작, 공작과 마찬가지 지위에 있었는데, 이들은 귀족가문 출신으로 제후로부터 봉토를 받고 충성을 서약했으며 그 자신도 봉토를 수여하고 가신을 거느렸습니다. 수도원은 많은 토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11세기 이전에는 토지의 생산성이 너무 낮았기 때문에 대공사를 일으킬만한 경제력이 없었으나, 11세기부터 12세기까지 농업 기술이 꾸준히 발전하여 경제적 잉여가 축적되기 시작했습니다. 농업기술 진보는 농민들이 사용하는 경작 도구에서도 일어났지만 보다 중요한 진보는 토지를 휴경지와 경작지로 나누어 3년 주기로 윤작하는 삼포제의 도입이었습니다.
수도원이 신의 집을 짓고 장식하는데 부를 사용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사람들이 알고 있던 건축의 모범은 고대 로마의 것이어서, 새로 짓는 성당은 로마식, 즉 로마네스크 양식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유럽을 여행하면 중세 이후로 시간이 정지되어 있는 듯한 조용한 지방도시나 농촌 한가운데 육중하게 서있는 성당을 만날 수 있습니다. 로마네스크 건축은 이처럼 농촌에 흩어져 있던 수도원을 중심으로 건설되는 한편, 12-13세기에 유럽 도시에서는 교역이 활발해졌고 이 과정에서 도시 주민의 상층을 형성한 상인들의 부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이들은 농촌에 토지를 구입하여 지주가 되었으며, 도시에서 살면서 도시 재정을 개인 사업처럼 주물렀습니다.
중세에는 기독교 윤리가 모든 경제생활을 규율했습니다. 모든 제품에는 공정한 가격이 존재하고, 상인이나 수공업자는 상품을 팔아 폭리를 취한다던지, 자신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이익을 추구해서는 안 되었는데, 돈을 빌려주고 높은 이자를 받는 것은 영혼을 파멸시키는 행위로 생각기 때문입니다. 하여, 부유한 상인들은 재산을 교회에 기부하여 종교적 구원을 얻으려고 애썼습니다.
중세도시의 주민은 스스로 예술을 발전시킬만한 지위에 있지는 못했으나 재산을 교회에 제공하여 간접적으로 예술을 후원했습니다. 길드에 속한 도시 주민은 길드 단위로 성당 건축에 필요한 재정을 후원했는데, 샤르트르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중 44개는 왕과 제후가, 16개는 성직자가, 42개는 길드가 기부했다고 합니다. 그중에는 빵집, 양복점, 푸주한, 환전상, 포목상, 제화점 길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2세기 프랑스 파리 북동쪽에 있는 샹파뉴 지방에는 유럽 최대의 정기시장이 발달했습니다. 이탈리아 상인들이 동방에서 가져온 향료, 염료, 비단과 플랑드르 지방 상인들이 가져온 모직물, 북유럽산 생선, 목재, 모피가 이곳에서 거래되었으며, 교역이 강을 타고 이루어졌기 때문에 샹파뉴로 가는 길목인 세느강을 끼고 있는 파리도 덩달아 번영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센 강 유역의 영주나 주교(도시의 영주가 주교인 경우도 있었음)는 상인에게 세금을 부과해 수입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활동을 보호하고 도시 교회는 상인이 바치는 돈으로 부유해졌습니다. 센 강 유역의 큰 길이 만나는 교차로에 위치한 생드니(Saint-Denis) 수도원에서 고딕 성당건축이 시작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생드니 수도원은 부유할 뿐만 아니라 7세기부터 왕의 유골을 안장해온 곳으로 왕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당시 수도원 원장인 쉬제(Suger)는 성직자이자 유능한 행정가로서 왕의 고문을 지냈고 왕이 십자군에 출정하느라 파리를 비운 동안 정치를 대신 맡기도 했습니다. 쉬제는 건축가는 아니지만 로마로마네스크 건축이 있던 남부 지역을 여행하여 견문이 넓었으며 생드니 수도원을 개축하면서 그곳의 명성과 권위에 걸맞은 새로운 건축 형태를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생드니 수도원 성당에 뒤이어 세워진 파리 노트르담 성당, 샤르트르 성당, 랭스 성당은 고딕 양식을 본받고 발전시켰으며 그것은 점점 유럽의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중세의 경제적 수준으로 볼 때 성당 건축은 비용이 과다하게 들었는데 성당 건축 공사가 자금 사정으로 중단되면 성직자들은 유물과 기적을 동원하여 모금활동에 나서곤 했습니다.
교회가 성당을 짓는데 아낌없이 재물을 쏟아 붓는 것을 보고 일부 성직자들은 비난의 소리를 높이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교회의 부를 신의 집을 치장하는데 쓰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았고 성당을 장엄하게 꾸미면 신도들의 믿음도 고양되리라 믿고 있었습니다.
높이 솟은 고딕 성당은 교회의 권위를 상징했으며 그 도시에 살고 있는 주민의 자긍심을 높였습니다. 하지만 고딕 예술은 봉건사회 한가운데서 나왔고 교회 성직자들이 그 정신과 형태를 모두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속에는 근대예술로 간주할 만한 요소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