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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 예술가에 대하여(2)[시인]

by 미스티스테이션 2023.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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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11세기말 봉건귀족의 성을 중심으로 세속 문학에 대한 수요가 생기면서 음유시인 트루바두르(troubadour)가 출현했습니다. 트루바두르가 출현하기 이전에는 떠돌이 음유시인들이 세속 문학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는데, 이들은 작은 무리를 지어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며 노래와 연주를 하기도 하고 익살극을 보여주기도 하면서 살아갔는데 법적인 보호나 교회의 성사를 받지 못하는 천민이었습니다.

 

교회 앞에 모인 군중에게 샤를마뉴 대제와 그 기사들의 무용담을 기리는 「롤랑의 노래」를 들려준 사람은 바로 이러한 떠돌이 음유시인이었습니다. 트루바두르가 출현하면서 음유시인의 지위는 높아졌습니다.

음유시인은 지역에 따라 트루바두르 또는 트루베르(trouvere)로 불렸는데 그 어원은 ‘발견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명칭은 시인이 하는 일의 지적인 성격을 강조합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교회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교회학교는 성직자를 길러내는 곳이지만 12세기에 학생 수가 늘면서, 성직자로 나아가지 않고 영주의 성에서 가정교사, 비서, 음유시인 같은 지적인 일을 해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최초의 트루바두르는 아키텐 공작 기욤(Guillaume) 9세입니다. 그는 십자군 원정을 지휘하고 스페인 코르도바에서 이슬람교도와 전투를 하며 생애를 보냈는데 스스로 연애 노래를 지어 불렀습니다. 트루바두르는 미천한 하인부터 기욤 9세 같은 제후에 이르기까지 출신이 다양했지만, 대부분은 상인의 아들, 하급 기사, 방랑 수도사, 학생이었다고 합니다.

 

트루바두르의 활동 무대는 영주의 성이었습니다. 귀족 트루바두르는 취미로 시를 짓고 노래를 작곡했지만 직업적인 트루바두르는 이 성 저성을 돌아다니며 영주의 식객으로 살아갔습니다. 영주는 이들에게 자신이 입던 옷과 말을 주었고 기분이 내키면 재산을 떼어주어 기사로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들은 영주 부인과 연애 사건을 벌이기도 하고 영주의 친구가 되기도 했지만 아무 데서도 받아주지 않으면 유랑자로 헤매야 했습니다. 이들은 장인에 불과한 미술가에 비해 나은 대접을 받았고 미천한 출신이라도 재능을 발판 삼아 기사 신분으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트루바두르는 궁극적으로는 영주의 즐거움을 위해 봉사하는 하인이며 그들이 어떤 대우를 받느냐는 순전히 영주의 관대함과 호의에 달려 있었습니다.

 

12세기 후반에 활동한 프랑스 시인 크레티앵(Chretien de Troyes)은 「수레를 탄 기사 랑슬로」, 「사자의 기사 이뱅」, 「페르스발(파르지팔) 혹은 성배 이야기」등 아서왕 전설과 관련된 운문소설 로망(roman)을 남겼습니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세속문학이 독일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12세기말 미네징거(Minnesinger)라 불리는 음유시인이 등장했습니다.

 

독일 음유시인도 일부는 최하층 출신이었고 하인리히(Heinrich) 6세처럼 최상층 출신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궁정의 후원자들에게 생계를 의존하는 종신이었습니다. 고대와 마찬가지로 중세 시대에도 시인과 음악가의 일은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트루바두르는 시인이자 음악가로 자신이 쓴 시에 곡을 붙이고 노래도 불렀는데, 때로는 류트, 하프 또는 바이올린의 옛 형태인 비엘의 반주에 맞춰 노래를 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시와 음악에 한결같이 능하지는 않아서 노래를 잘 못하는 사람은따로 가수를 데리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시를 쓰지않고 단순히 악기만 연주하는 악사들은 길드를 구성했지만 트루바두르는 자기 직업이 수공업과 다르다고 생각했으므로 길드를 조직하지 않았습니다. 예외적으로 독일 지역에만 중세 말에 음악가 길드가 조직되었고 마이스터징거(Meistersinger)라고 해서 가수에게 장인 자격을 부여했습니다.

 

바그너(Richard Wagner)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1868년)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스(Hans Sachs)가 그러한 인물입니다. 작스는 16세기 실존 인물로 구두 만드는 장인이었는데, 직인 시절 마이스터징거 조합에 가입했고 유럽을 여행하며 시 수업을 했습니다.

그는 뉘른베르크로 돌아와 공방을 열고 평생 동안 구두를 만들며 시를 썼다고 합니다. 중세 말에 시와 음악이 분리되면서 시인과 음악가를 겸한 트루바두르도 시인 또는 작가로 변모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르네상스 시대가 되면 도시귀족의 후원을 받는 학자이자 인문주의자로 변신합니다.

 

12세기에 성당 건축 공사장에서 돌 깎는 석공이 영주의 성에서 귀부인을 위해 노래하는 트루바두르와 만났다면 두 사람은 자신들이 예술이라는 같은 일에 종사하는 동업자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석공은 트루바두르보다는 자물쇠 만드는 사람을 자신과 더 가깝게 느꼈을 것이고 트루바두르는 돌가루를 뒤집어쓰고 육체노동을 하는 석공이 시를 짓고 노래하는 자신과 무슨 관계가 있으랴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면 이 두 사람은 예술가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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