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중세 예술가
수도사·성직자
중세 내내 수도원은 종교적 기능과 더불어 지식의 보존과 전달이라는 문화적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이탈리아 볼로냐에 11세기말 설립된 대학이 체계적으로 발전하는 13세기까지 수도원은 유일한 문화적 구심점이었습니다. 수도원의 수도사 구성은 중세사회의 위계적 신분질서를 반영하는데, 봉건귀족의 자제로 장차 수도원장, 주교 같은 성직자가 될 수도사와 농민층의 자제인 수도사간에는 차별이 있었습니다.
하급 수도사는 수도원의 영지나 부속 공방에서 여러 가지 일에 종사했습니다. 단순노동은 수도원에 속한 노동자들이 맡아하거나 농민의 부역을 활용했지만 장원 관리, 수도원 부속 성당 건축, 작곡, 필사본 제작 같이 기술이 필요한 일은 수도사들이 맡아했습니다.
수도원 내에 있는 수도사만으로 부족할 경우에는 외부의 장인을 고용했는데, 성당을 건축할 때에는 기술자를 멀리 비잔틴에서 불러오기도 했습니다. 떠돌이 예술가들도 처음에는 수도원 공방에서 일을 배운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수도원 공방은 예술작품 생산기관인 동시에 예술가 교육기관이었습니다.
여기서 기술을 배운 장인들은 다른 교회나 세속 봉건귀족의 궁정을 위해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부유한 수도원을 중심으로 중세예술이 태동했을 때, 수도사들은 건물과 시설을 스스로 건설하고 의식주에 필요한 물건을 자급자족했습니다. 수도사들이 제작한 물건 가운데 오늘날 예술작품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은 성당 건축 외에도 다양합니다.
그 가운데 뛰어난 예술품의 하나는 바로, 필사본입니다. 수도원마다 전용 필사실(scriptorium)이 있었고 거기서 제작한 책으로 도서관을 채웠습니다. 도시가 발달하고 도시마다 대학이 성장하는 13세기경 수도원은 문화생산자로서 독점적 지위를 잃었습니다. 도시에서는 종교적 건축까지 세속 기술자가 담당했으나 종교음악의 영역에서만은 중세 말까지 성직자들이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파리 노트르담악파의 페로텡(Perotin), 레오냉(Leonin)이나 중세 말 음악을 대표하는 비트리(Philippe de Vitry), 마쇼(Guillaume de Machaut)는 모두 성직자입니다.
랭스 성당의 고위성직자인 마쇼는 위대한 시인이자 작곡가로 왕과 제후들로부터 많은 영예와 후원을 받았습니다. 수도사와 성직자는 스스로 예술가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수도원 공방에서 필사에 열중했던 수도사들은 책의 내용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책을 베끼는데 바친 시간과 수고와 노력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수련행위로 여겨졌습니다. 수도사들은 글자를 많이 베낄수록 죽은 후 연옥에서 보내야 할 햇수가 줄어들고 반대로 졸거나 방심하여 글자를 빼먹거나 잘못 쓰면 연옥에서 보내야할 햇수가 늘어난다고 생각했습니다. 더위와 추위, 졸음과 피로와 싸우면서 지루한 작업을 해야 했던 수도사들은 필사자를 괴롭히는 악마를 두려워하고 경계했다고 합니다.
미술가
수도사가 건설에 주도적 역할을 한 로마네스크 성당과 달리, 도시의 고딕 성당은 세속 미술가의 손에 의해 건설되었습니다. 대규모 고딕 성당건축은 수도원에서 이루어지는 소규모 성당건축보다 훨씬 복잡하고 전문적인 기술을 필요로 하는데, 수도원에서는 건축공사가 끊임없이 있지는 않으므로, 수도사들은 건축술을 전문적으로 배우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특정 수도원에 매이지 않고 일을 따라 각지를 돌아다니는 세속 기술자인 석공들은 그 점에서 훨씬 유리했습니다. 고딕 성당을 짓는 데는 석공이 수백 명까지 필요했는데 이들은 일자리를 따라 무리 지어 이동하는 유랑자 집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성당 공사는 대개 몇십 년씩 계속되었기 때문에 이들은 한 곳에서 오래 일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직종과 마찬가지로 석공도 12세기에 길드를 결성하는데, 석공길드는 건축에 종사하는 장인과 직인으로 구성되었고 건축주인 교회가 이들에게 행정적, 예술적 지시를 했습니다.
석공의 우두머리인 석공장은 현장에서 작업을 감독하는 한편 오늘날의 건축가처럼 설계도 맡아했습니다. 석공장 밑에는 직인들이 있는데 이들은 다시 자유석공과 막일석공으로 나뉘었습니다. 막일석공은 돌 쌓는 일을 했고, 자유석공은 돌을 깎아 조각을 하거나 창틀, 천장을 만드는 숙련 노동을 했습니다. 대부분의 지인은 장인이 되지 못했고, 극소수만이 석공장 또는 공사장 감독으로 신분상승했습니다. 따라서 장인으로만 구성된 다른 길드와 달리 석공길드는 장인과 직인을 포함하여 구성되었고, 다른 길드에 비해 조직이 느슨해 한 조합에서 일하다 다른 조합으로 쉽게 옮겨갈 수 있었습니다.
석공들은 공사장 안에 세워진 목조가옥인 막사(lodgeg)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그 이름은 석공길드를 로지라고 불렀다. 건축 장인 역시 수도사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예술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그저 숙련된 기예를 지닌 기술자였고 자부심을 지닌 예술가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성당 같은 대규모 건축 사업에는 보통 건축 대장이 꼼꼼하게 작성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중세 석공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회계장부는 그들이 작업한 날수, 지급받은 임금에 대해서는 알려주지만 그들의 인간적 면모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오늘날 이름이 남아있는 미술가는 많지 않은데, 프랑스의 기욤 드상스(Guillaume de sens)는 석공장 가운데 최초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는 영국에 건너가 캔터베리 성당 개축에 참여했는데 당시 성당 개축 작업을 기록하여 보고서를 작성한 수도사 덕분에 이름이 남았으나, 그의 개인적 삶에 대해 알려진 바는 매우 적습니다. 그가 영국에 초빙된 것으로 보아, 그의 명성은 높았던 것 같습니다.
캔터베리 성당에서 작업을 감독하던 중 비계에서 떨어져 더 이상 현장에서 일할 수 없게 되자 프랑스로 돌아갔습니다.
파리 노트르담 성당과 상스 성당 건축에도 관여한 것으로 보이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석공장 역할은 점점 중요해졌고, 맡은 일의 성격상 고위 성직자와 교류할 기회도 많았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석공장은 지식을 지닌 건축가로 존중받고 비교적 후한 보수를 받았다고 하는데, 고딕 전성기에 지어진 랭스 성당이나 아미앵 성당에는 설계를 맡은 석공장 이름이 바닥에 새겨져 있습니다.
일반 직인들은 어떠했을까? 프랑스 루앙에서 발견된 장부에는 성당 목조 작업에 든 비용을 비롯하여 십장은 누구이고 출신지는 어디이며 목공의 임금은 얼마인지 하는 세세한 사항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목공은 목각사로 불렸는데 한점 당 25 솔(프랑스의 옛 화폐단위) 정도를 받고 설교단과 성직자석을 제작했습니다. 13세기말 영국에서는 석공이나 목공 같은 숙련공은 일반 노동자 임금의 두 배인 일당 3-4펜스를 받았습니다. 특수한 작업을 할 때는 5펜스 이상도 받았고, 런던에서는 일당이 다른 지역보다 더 높았습니다. 참고로 당시 1 페니를 가지면 달걀 30~40개, 비둘기 3~4마리, 혹은 치즈 2파운드를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요컨대 중세 예술가들은 기술자 취급을 받았지만 그들의 기술이 숙련을 필요로 하는 것인 만큼 일반 노동자보다 나은 대우를 받았으나, 일반 석공, 조각가, 스테인드글라스 제조공은 기술자 이상으로 출세할 기회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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