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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시대 예술 수요자에 대하여(2)

by 미스티스테이션 2023.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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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예술 수요자(2)

 

봉건귀족은 힘이 남아있는 한 왕에게 저항하지만 왕이 사법제도와 조세제도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면서 자신의 영지에서 누려온 배타적 권리를 상실했습니다. 영국의 장미 전쟁(1455~85),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1562~98)은 봉건귀족이 세력을 지키려고 자기들끼리 또는 국왕에 대항해 벌인 싸움입니다. 오랜 내전의 결과, 많은 귀족이 목숨을 잃고 살아남은 귀족도 세력을 크게 상실했습니다. 대귀족은 국왕의 궁정신하이자 연금수혜자가 되었고, 중소귀족은 국왕의 상비군에서 일하는 봉급생활자가 되었습니다. 과거 프랑스에서 국왕은 파리 지방의 영주에 불과했고, 다른 지방 영주보다 나을 것이 없는 존재였으나 이제는 왕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고 귀족은 왕의 신하가 되었습니다. 

 

상업이 발전하고 왕권이 성장하는데 반비례하여 봉건귀족과 교회세력은 약해졌습니다. 16세기는 종교개혁의 시대였는데, 독일에서 종교개혁을 촉발시킨 표면적 빌미는 한 젊은 대주교가 고속 승진의 대가를 지불하는데 필요한 돈을 마련하려고 면죄부 판매를 지나치게 독려한 일이었습니다. 면죄부 판매는 종교개혁에 불을 붙이지만 사실 그 자체가 종교개혁의 원인은 아닙니다. 면죄부 발행은 중세 말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도시경제가 발달하면서 토지를 경제적 기반으로 하는 교회는 수입이 줄어들었습니다. 교회는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면죄부 발행을 시작했는데 그것은 교회의 영적 권위를 스스로 손상시키는 행위였지만 당시에는 교회의 서슬이 시퍼랬기 때문에 섣불리 비판이 제기되지 못했습니다. 1517년 일개 수도사인 루터(Martin Luther)가 교회문에 내건 비판이 반향을 일으킨 것은 면죄부 발행이 남용된 까닭도 있지만 종교개혁을 고대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성숙된 때문입니다. 교회로 인해 경제활동을 제약받은 상인들, 특권계급에 반감을 품은 가난한 농민들, 교황에게 눌려 지내온 일부 제후들은 종교개혁을 적극 지지했습니다. 독일의 루터파 제후들은 교황과 결별하고 교회 재산을 몰수하여 이익을 챙겼으며, 아우크스부르크, 제네바 같은 상업도시는 개신교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은 중세시대부터 교회가 누려온 지위에 일대 타격을 가했습니다. 

 

통일된 국민국가 형성에 힘을 기울이던 절대군주들은 종교개혁에 이중적 태도를 취했습니다. 국왕들은 한편으로는 종교개혁을 지지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많은 토지를 소유한 교회는 국가에 세금도 내지 않고 국가의 통제도 받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거둔 부는 그 나라의 왕이 아니라 로마 교황청으로 흘러 들어갔고 교황은 유럽 각국 정치에 깊숙이 관여했습니다. 봉건영주를 제압하고 권력을 장악하려는 국왕에게 부유한 봉건 영주이자 교황의 지시를 받는 교회는 큰 장애물이었습니다. 절대 군주들은 종교개혁을 통해 경쟁자인 교회 세력이 약화되기를 희망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왕들이 종교개혁을 무턱대고 지지할 수 없는 사정도 있었습니다. 국왕은 교회와 마찬가지로 시민이나 농민을 지배하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종교개역히 포함한 저항적 성격까지 용납할 수는 없었습니다. 또한 왕으로서는 국민의 종교가 통일되어 있으면 통치하는데 유리했습니다. 

 

프랑수아 1세(Fransois, 1515~47재위)가 처음에는  종교개혁에 공감하는 태도를 보이다 개신교도들이 격문을 내붙이고 소란이 커지자 탄압으로 돌아선 것은 종교개혁에 대한 절대군주의 애매한 입장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하지만 국왕이 개혁을 직접 편들건 그렇지 않건 종교개혁으로 인한 교회의 분열은 결과적으로 왕권에 유리하게 작용했습니다. 

 

16세기로 넘어갈 무렵 절대왕권이 등장하면서 프랑스나 영국의 왕궁은 장대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샤를(Charles 8세, 1483~1498 재위)이 즉위한 후 궁정을 유지하고 신하에게 직책과 연금을 나누어주는데 쓰이는 지출이 빠르게 늘어났습니다. 프랑수아 1세처럼 호탕하고 과시하기 좋아한 군주는 물론 상인처럼 돈의 가치를 잘 알고 인색한 영국의 헨리 Henry 7세(1485~1509  재위)도 왕의 위엄을 보이려면 그에 걸맞게 궁정을 유지해야 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크 시대에는 귀족계급 내에서 세력 교체가 활발히 진행되었습니다. 국왕은 봉건귀족을 중앙귀족으로 편입하고 부유한 대상인도 귀족에 편입시켰습니다. 부와 실무 지식을 지닌 대상인은 국가 재정의 원천이자 국가 행정을 담당하는 유능한 관료의 원천이기도 했습니다. 국가 통일과 국왕의 특혜가 있어야 번창할 수 있는 대상인들은 절대주의를 옹호했습니다. 국왕은 고분고분하지 않은 봉건귀족을 견제하고 자신의 추종세력을 키우기 위해 관직과 귀족칭호를 사고파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국왕은 새 관직을 만들어 대상인에게 팔았고 그 후손에게 승계를 허용했습니다. 국왕은 토지에 기반을 둔 전통귀족과 상업에 바탕을 둔 신흥귀족에게 중앙 관직을 배분하되, 신흥귀족에게 점차 많은 관직을 부여하여 양자 간에 세력균형을 도모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전통 대겁귀족과 신흥 법복귀족이 서로 견제하는 가운데 절대왕권이 확고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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