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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시대의 예술 수요자에 대하여

by 미스티스테이션 2023.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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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예술 수요자

 

16세기에 이르러 이탈리아는 경제적 문화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도시국가인 이탈리아는 국왕을 중심으로 통일을 이룩한 국민국가인 프랑스나 스페인의 적구사 되지 못했습니다. 16세기에 프랑스와 스페인은 이탈리아를 두고 세력다툼을 벌였습니다. 최종 승리는 스페인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겸한 합스부르크가의 카를 5세에게 돌아갔습니다. 스페인 군대는 로마를 짓밟았고 피렌체의 메디치 정권은 허수아비로 전락했습니다. 

 

피렌체, 베네치아 같은 이탈리아 도시국가에서 르네상스 문화가 꽃핀 것은 이 도시들이 지중해의 무역로를 지배하고 동방무역을 독점하여 쌓아 올린 부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자 동방 무역은 축소되었습니다. 서부 유럽 국가들은 동양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새로운 항로 개척에 나섰습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왕가가 제일 먼저 탐험활동을 지원했고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도 뒤이어 탐험에 뛰어들었습니다. 그 결과 베일에 싸인 세계 여러 지역이 유럽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지리상의 발견으로 이베리아 반도 한 구석에 치우쳐 있던 리스본과 세비야가 국제 교역의 중심지로 떠올랐습니다. 상인들은 이곳에 모인 동양의 향신료, 아프리카의 금, 아메리카의 은을 플랑드르 지방의 안트베르펜으로 가져가 북서부 유럽에서 온 공산품과 교환했습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16세기 후반에 문자 그대로 황금시대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세계무역을 조직하기에는 너무 작은 나라였기 때문에, 스페인은 왕과 귀족층이 분에 넘치는 사치에 열중하고 공업을 근대화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17세기가 경과하는 동안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에 뒤지고 말았습니다. 16세기 무역이 동방의 향료와 아메리카의 금은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반면 17세기 무역은 노예가 주축이었습니다. 유럽의 노예상인은 아프리카에서 흑인을 헐값에 사들이거나 강제로 잡아들여 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에 팔고, 돌아올 때는 금은과 식민지 플랜테이션에서 생산된 설탕, 면화, 담배를 싣고 왔습니다. 

 

이러한 국제 무역활동에는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의 지원과 보호가 필수적이었습니다. 해외시장을 놓고 국가 단위의 경쟁이 일어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유럽 각국은 지방분권에서 벗어나 강력한 국사력을 가진 국민국가로 앞다투어 나아갔습니다. 프랑스, 스페인, 영국은 15~16세기 동안 제후들끼리 격렬한 내전을 거쳐 절대주의 국가로 변모했습니다. 왕의 군대는 더 이상 거추장스러운 갑옷을 입고 말 탄기사가 아니라 화승총과 대포로 무장하고 봉급을 받는 외국의 용병이었습니다. 해적지로가 다름없는 무역활동과 식민지 쟁탈전에서, 그리고 왕을 넘보는 제후들을 다스리거나 농민 반란을 진압하는데 강력한 군대는 없어서 안될 존재였습니다. 

 

16세기에 군사력이 가장 강한 나라는 스페인이었습니다. 스페인은 대포와 총을 앞세워 아메리카 대륙을 유린했습니다. 17세기에는 영국이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습니다. 대담무쌍한 드레이크 선장은 금은보화를 가득 실은 스페인 상선을 노략질했고 엘리자베스 1세는 귀족 작위를 주어 그를 격려했습니다. 영국은 네덜란드와 한편이 되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지만 아메리카 대륙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충돌했습니다. 

 

국제 무역활동을 토대로 부를 쌓은 대상인과 금융업자는 국왕의 재정적 기반이었습니다. 대외 경쟁과 국내 통일을 위해 꼭 필요한 군대를 유지하는 비용은 이들로부터 조달되었습니다. 국왕은 대상인과 금융업자에게 자금을 끌어다 쓸 뿐 아니라 왕국을 경영하는데 그들의 경험과 지식을 이용했습니다. 16세기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이 세려다툼을 벌일 때, 독일의 대은행가 푸거 집안은 합스부르크 왕가를 지원하여 카를 5세가 승리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포목상집안 출신인 그레셤은 엘리자베스 1세의 재무장관을 지냈습니다. 

 

상인들이 자유롭게 활동하려면 지방을 분할하여 다스리는 여러 명의 봉건귀족보다 전국을 통치하는 한 명의 국왕이 유리했습니다. 오랫동안 도시를 지배한 봉건 영주들은 서로 반목하며 자주 싸움을 벌였는데 어느 쪽이 이기든 상업발전에는 좋지 못했습니다. 상인들은 상업로를 따라 흩어져 있는 영주에게 하나하나 통행세를 내고, 때로는 붙들려 몸값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상인들은 강력한 국왕이 지방 영주의 봉건적 지배와 수탈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 주기를 희망하여 국왕에게 기꺼이 자금을 제공했다. 국왕은 이 돈으로 급료를 주고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상비군을 고용했으며, 더 이상 지방 영주의 충성심에 기대지 않게 되었습니다. 경제활동 단위는 도시에서 국가로 확대되고, 사람들은 더 이상 한 도시의 시민이 아니라 자신이 한 국가의 국민임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국민의 개념이 자라나면서 봉건귀족의 권위는 쇠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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