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
유럽 각지에 흩어져 있던 수도원과 교회는 중세 시대에는 가장 중요한 예술 후원자였지만 르네상스 시대에는 역할이 축소되었고 도시국가에 예술수요의 주도권을 내주게 됩니다. 교황이 지배하는 로마만이 도시국가의 세속적 예술수요자와 경쟁하고 있었는데, 당시 교회의 위신은 14세기에 일어난 아비뇽 유폐와 교회의 분열로 말미암아 땅에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1309년 교황 클레멘스(Clemens) 5세는 프랑스 왕의 압력과 교황청 내부의 알력으로 로마에서 프랑스 아비뇽으로 거처를 옮겼고 그 후 5명의 프랑스인 교황이 선출되었습니다. 교황청의 아비뇽 이전에 대해 영국과 독일은 맹렬히 반발했는데, 1378년 교황 그레고리우스(Gregorius) 11세는 로마로 다시 거쳐를 옮기지만 아비뇽에서는 따로 교황을 선출했습니다.
1417년까지 로마와 아비뇽에는 두 사람의 교황이 재위하며 서로 정통성을 주장했고 이는 교황의 권위에 큰 손상을 입혔습니다.
교황들은 더 이상 유럽 전체에 힘을 미치지 못함을 깨달았지만, 이들은 추락한 위신을 되찾고 로마(교황령)에서만이라도 권위를 지키려고 고군분투했습니다. 교황들은 무자비한 폭력, 암투,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로마와 주변의 소국을 평정했습니다.
로마 교황청의 주된 수입원은 성직 매매와 살인죄까지도 용서해준 면죄부 판매였습니다. 점차 로마 교황청은 유럽 어느 도시에 지지 않을 만큼 풍부한 재원을 확보했고 그것을 사용하여 종교예술을 새롭게 꽃 피우게 됩니다.
특히 16세기 초 교황 율리우스(Julius) 2세(1503년~1513년 재위)와 레오(Leo) 10세(1513년-1521년 재위) 시대는 전성기였습니다.
율리우스 2세는 앞선 교황에 비해 교양과 도덕성을 갖춘 인물로 교회의 위신을 회복하기 위해 성 베드로(San Pierio) 성당의 신축을 추진했습니다. 메디치 집안 출신인 레오 10세는 세속적 성향이 강해 주위에 예술가들을 불러 모았고 로마를 예술의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봉건귀족
봉건귀족은 중세 시대에 교회와 더불어 예술수요의 중심축을 이루었지만 르네상스 시대에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봉건귀족은 토지 수입에 경제적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상공업의 성장과 더불어 쇠퇴하고 있었습니다. 부르고뉴 공국의 통치자들은 봉건귀족으로서는 거의 마지막 예술 후원자인데, 이 공국은 프랑스 왕국의 일부였습니다.
부르고뉴 공작 가문은 프랑스 왕가와 사촌간으로 14세기~15세기에 결혼과 토지 매수를 통해 영토를 확장하고 프랑스 왕 자리를 넘볼 정도로 세력을 키우는데, 당시 공국의 영토는 현재의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북동부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었습니다.
부르고뉴 공국의 통치자들은 호사스런 생활로 유명했습니다. 이들은 진기한 서적과 필사본을 수집하고 음악가와 화가를 고용해 자신의 궁정을 유럽에서 가장 화려하게 만들었습니다. 선량공 필리프(Philippe le Bon,1419년~1467 재위) 시대에 공국은 전성기를 누리게 됩니다. 부르고뉴 공국의 통치자들 같은 봉건귀족은 합리적이고 타산적인 이탈리아 도시귀족과 달리 무모하고 아랫사람을 함부로 다루며 통 크게 낭비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전사였습니다.
이들의 예술 수요에는 중세적 성격이 남아 있으며, 봉건귀족과 도시귀족은 그들이 기고 있는 경제기반의 차이만큼 예술수요의 방식과 내용도 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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