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중세 말 문학과 분리된 음악은 르네상스 시대에 독자적으로 발전합니다. 14세기 이후 세속 권력의 중심인 봉건귀족 궁정, 상공업과 화폐 경제의 발달로 성장한 도시귀족 궁정은 음악생산의 중심지였습니다. 중세시대에는 교회에서 사용하는 종교음악과 봉건귀족 궁정에서 즐기는 트루바두르의 세속음악은 전혀 다른 영역이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양자가 하나의 음악으로 합쳐지는데, 종교음악은 세속음악에서 모티브와 기법을 빌려오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세속음악은 문학을 보조하는 역할에서 벗어나 복잡하게 발전했습니다.
르네상스 음악의 발전은 부르고뉴 공국이 있는 서북부 유럽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미술을 비롯한 다른 예술장르에서는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북쪽으로 확산되나 음악만은 그 반대 경로로 발전했습니다.
부르고뉴 공국의 통치자들은 음악을 궁정생활의 중요한 요소로 정착시켰습니다. 음악은 궁정의 권력과 부를 과시하는 중요한 수단이었으며, 궁정에는 성가대와 악단이 있었습니다. 화가가 궁정을 장식하는데 동원되듯이 작곡가는 궁정에 거주하면서 제후의 영광을 드높이는 곡을 작곡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세속 음악이 문학과 별도의 영역으로 확립되면서 음악은 종교나 문학의 보조 수단이 아니라 듣는 사람에게 인간적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독자적 예술로 자리 잡았습니다.
음악이 시민생활 속에 침투하면서 세속음악이 크게 발전했습니다. 다성 가곡, 류트 반주 가곡, 무곡이 시민생활을 풍성하게 했습니다. 특히 다성 가곡은 이탈리아와 영국의 마드리갈(madrigal), 프랑스의 샹송(chanson), 독일의 리트(Lied) 등 각 나라별로 특징을 지닌 양식으로 성장했습니다.
수준 높은 세속음악이 발달하면서, 종교음악도 세속음악으로부터 기법과 멜로디를 받아들여 한층 세련된 양식으로 발전했습니다. 종교화가 세속적인 모티브로 채워진 것처럼 미사곡도 세속음악에서 차용된 요소를 사용하는데, 세속음악 요소를 종교음악에 사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작곡가들은 멜로디에서 세속적 원천과 종교적 원천을 혼합하고 가사에서도 때로는 선정적이기도 한 샹송의 단편을 사용했다. 샹송과 마찬가지로 리트도 교회 합창곡이나 찬미가에 음악적 소재를 제공했습니다. 과거에는 종교음악과 세속음악이 엄격하게 구분되었지만 이제는 어떤 음악이 종교적이냐 세속적이냐를 구별하는 기준은 양식이 아니라 주제였기에 세속 가요가 예배음악이나 미사곡에 쓰이기도 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도 중세와 마찬가지로 기악보다 성악이 중시되면서 기악은 노래와 무용의 반주로 분위기를 돋우는 종속적 역할을 했습니다. 기악과 성악이 경합할 경우, 기악은 성악 성부를 그대로 중복하여 음향을 강화시키는가 하면 참석 못한 가수 대신 들어서기도 했습니다. 이 시대는 기악 반주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아카펠라(A cappella) 합창음악의 황금시대였기에, 기악은 독립된 영역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귀족 궁정에서 무용이나 연극을 보조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16세기는 ‘춤의 세기’로 불릴 정도로 사교무용이 번성하여 기악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현악기와 관악기의 반주에 맞추어 이탈리아, 프랑스의 귀족들은 손을 맞잡고 윤무를 추거나 2명이서 춤추는 것을 즐기면서, 춤곡이 기악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7세기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의 모음곡은 대부분 이 르네상스 춤곡에 기원을 두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까지 성악곡은 양적으로 기악곡 보다 많으며, 1500년 이전의 음악은 모두 성악곡이고, 16세기 음악도 90%가 성악곡이었습니다. 16세기 후반 베네치아 작곡가 가브리엘리(Giovanni Garbrieli)는 극적이고 색채감이 풍부한 기악합주곡을 작곡했습니다. 이는 독립적인 기악곡의 출현은 여태까지 성악보다 천시된 기악의 지위가 개선된 것을 뜻합니다.
17세기 바로크 시대에 이르면 사람의 목소리와 흡사한 악기가 개발되고, 낮은 음역을 악기가 대신하면서 기악이 성악과 대등하게 됩니다.
공연예술
르네상스 시대에는 중세 기독교 세계에서 자취를 감췄던 연극·무용 같은 공연예술이 부활하고 발레·오페라 같은 새로운 공연예술이 등장했습니다. 공연예술은 장차 바로크 시대에 예술을 주도하는 지위에 오르는데, 중세 종교극은 14세기를 정점으로 쇠퇴하고 궁정과 귀족사회를 중심으로 그리스 고전극을 모방한 ‘학자 연극(commedia erudita)'이 탄생합니다.
인문주의 학자들이 쓴 이 연극은 대중적 인기를 얻지는 못했으나 연극을 언어예술로 바꾸어놓았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고전극은 17세기 프랑스로 건너가 개화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축제의식으로 행해진 무용은 중세가 시작되면서 연극, 음악과 마찬가지로 타락한 이교도 오락이라는 이유로 금지되었습니다. 중세 유럽이 안정을 되찾은 후, 연극과 음악은 종교적 목적에 봉사하기 위해 제한적으로 복권되지만 무용만은 그렇지 못하였는데, 무용은 하층 민중의 저급한 오락 형태나 귀족의 가장무도회 형태로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이처럼 존재가 미미한 무용은 르네상스 시대에 세련된 모습으로 면모를 일신했습니다. 부유한 귀족들이 사교 모임에서 춤을 즐기면서 무용의 동작과 의상은 세련미를 갖추고, 남녀가 한 쌍이 되어 춤추는 방식도 나타납니다. 16세기말 유럽 귀족사회를 휩쓴 무용의 열기는 많은 춤곡을 낳았고 기악 발달에도 공헌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기독교적 내용 대신 그리스 신화에서 따온 내용을 바탕으로 한 세속적 무용극인 발레가 발전했습니다.
발레는 오페라와 함께 여러 가지 기술적 고안물과 시각적 효과를 자아내는 장치에 힘입어 화려하고 복잡한 형식을 갖춘 공연예술로 발전했습니다. 오페라는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모습을 갖추는데, 내용은 그리스 신화나 목동 연극에서 따왔으며, 대화와 노래의 중간 형태를 취하는 가사를 위주로 했습니다. 왕이나 귀족은 결혼식 같은 행사를 위해 오페라를 주문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고전극은 별 성공을 거두지 못한 반면 오페라는 크게 환영받았습니다. 17세기 베네치아에는 6-8개의 상설 오페라극장이 있었으며 이탈리아 오페라가 전 유럽의 도시에서 상연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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