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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시대의 예술에 대하여(2)[미술]

by 미스티스테이션 2023.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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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르네상스 시대에 회화, 조각, 건축으로 미술 장르의 분화가 일어났습니다. 중세시대에는 건축현장에서 모든 미술작업이 이루어졌으나 이제 회화와 조각은 건축현장을 떠나 실내 작업으로 변했습니다. 그동안 회화는 건축의 일부분인 벽화로 존재했지만 이제 널빤지에 그려진 패널화로 바뀌었습니다. 조각도 건축 현장 벽면에 끼워진 돌을 깎는 일에서 별도로 완성한 조각 작품을 건물에 배치하는 일로 바뀌었습니다.

 

회화와 조각이 건축에서 분리되어 독립된 장르로 되는 경향은 앞서 본 미술가의 분화 경향과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르네상스 건축가는 고딕 양식을 멀리하고 고전 건축의 원칙을 활용했습니다. 고딕예술이 병렬과 누적의 원리를 지닌 데 반해 르네상스 예술은 한 부분을 전체에서 떼어낼 수 없으며 모든 부분을 동시에 파악하도록 요구하는 통일과 집중의 원리 위에 서있습니다.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한 피렌체 대성당의 돔 지붕은 더 이상 닫힌 공간이 아니라 외부로 활짝 열린 창구입니다. 피렌체, 베네치아 같은 이탈리아의 도시에는 메디치 궁전처럼 질서와 비례를 존중한 저택이 건축되었습니다. 건축가들은 과학적 호기심을 갖고 예술을 대했으며 그 속에서 통일과 법칙성을 인식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고딕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건축의 지위는 약화되었습니다.

 

종교건축은 여전히 건축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만 고딕 시대처럼 많이 지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도시귀족들은 아름다운 저택을 소유했지만 규모가 너무 크거나 야단스런 치장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왕과 다름없는 정치권력을 누렸지만 표면상 왕이 아니고 시민의 대표자였기에  너무 크고 화려한 궁전을 지어 남의 이목을 끄는 일을 삼갔습니다.

 

이 시기에 지어진 이탈리아의 성당이나 도시귀족의 궁전(palazzo)은 균형미가 있고 우아하지만 장엄, 웅장, 화려 같은 형용사와는 거리가 멉니다. 건축 수요가 줄어든 대신 회화, 조각, 공예품에 대한 수요는 커졌습니다. 도시귀족과 부유한 상인은 그림과 조각, 가구, 도자기로 저택을 치장했는데, 이 시기에 회화는 눈부시게 발전하게 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티치아노 등 르네상스 거장은 모두 회화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미켈란젤로만은 스스로 조각가이기를 고집하지만 그도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와 벽화 「최후의 심판」에서 화가로서 재능을 아낌없이 발휘했습니다. 소형 패널화 제작을 출발로 회화는 건축과 갈라져 독자적인 길을 가기 시작했으며, 프레스코 화법으로 그리는 벽화는 성격상 건축과 분리될 수 없으나 크기가 작은 패널화는 제단장식화나 집안장식물로 건축과는 별도로 주문되었습니다.

 

회화의 내용은 종교화가 압도적이지만 종교적 주제는 점점 세속적 모티브로 채워지게 됩니다. 여왕처럼 왕관을 쓰고 옥좌에 앉아 있는 성모 대신 맨바닥이나 베개 위에 앉아 아기를 품에 안고 있는 행복한 어머니처럼 묘사된 성모가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가족이나 성자의 생애를 그린 종교화도 풍속화처럼 사실적인 세부묘사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화가들은 주문자의 부유함을 나타내는 값비싼 보석과 의복, 가구 따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종교화에 세속적 분위기를 불어넣었습니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생겨난 진짜 세속적 회화장르는 초상화입니다. 중세에는 초상화가 드물었고 어쩌다가 초상화를 그린다 하더라도 화가는 대상을 흡사하게 그리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14세기부터 종교화 속에 기증자의 초상을 그려 넣는 관행이 시작되었고, 15세기에는 초상화가 집안에 걸어놓기 위한 별도의 패널화로 등장했습니다. 초상화 수요는 꾸준히 늘어나 16세기에는 가히 폭발적이라 할만합니다.

 

교황, 성직자, 귀족뿐만 아니라 학자, 문필가 그리고 돈을 지불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초상화를 가지려고 했으며, 인물화로 정평이 나있는 티치아노에게 초상화 한 폭을 그려 받기 위해 고위 성직자, 왕후, 귀족들이 줄을 섰다고 합니다.

르네상스 최초의 화가로 간주되는 조토는 신흥 도시귀족의 관점을 화폭에 표현했는데, 그의 후원자는 바르디, 페루치를 비롯한 피렌체 상인 집안이었습니다.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예배당에 있는 「최후의 심판」(1305년경)은 스크로베니(Enrico Scrovegni)의 후원으로 그려졌는데 작품 속 후원자의 모습은 부와 권력을 지닌 도시귀족의 지위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사초는 브랑카치 예배당에 있는 「성전세」(1427년)에서 중세 미술에서는 다루지 않은 성서 일화를 다루었다. 중앙에 등을 보인 세리가 예수와 제자들에게 성전세를 요구한다. 왼편에는 베드로가 연못에서 물고기를 잡아 입에서 세금을 낼 동전을 꺼내고 있습니다. 이 장면을 주제로 삼은 이유는 해양 사절단의 일원인 후원자 브랑카치(Brancacci)의 소망에 따라 바다의 경제적 중요성을 제시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림에서 물고기 입에서 동전을 꺼내는 기적을 멀리 작게 그린 것은 르네상스 합리주의의 영향입니다. 조각도 건축에 대한 종속적 지위를 탈피했습니다.

 

조각품은 건축현장이 아닌 조각가의 작업장에서 생산되었으며, 성당 현관이나 앞면 벽을 장식할 조각상도 이제는 공방에서 따로 만들어졌습니다. 전에는 교회 제단 장식이나 집기가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르네상스 시대에는 마리아 상, 십자가 상, 피에타 상 같은 개인용 소형 조각의 주문이 많아졌습니다. 회화에서 초상화 수요가 늘어났듯이 조각에서도 무덤을 장식할 초상 조각 주문이 늘어났습니다.

기베르티와 그의 제자 도나텔로는 고대 고전 조각의 전통을 부활시켰습니다. 1402년 피렌체 성당 세례당의 청동문 발주를 위한 경연에서 기베르티의 작품이 브루넬레스키 작품을 누르고 선정된 일은 르네상스 미술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으로 인용됩니다.

 

「천국의 문」(1425년~1452년)으로 불리는 이 청동문에는 성서에 나오는 일화를 묘사한 10개의 장면이 부조되어 있습니다. 기베르티는 하느님께 바쳐질 찰나에 있는 이삭을 아름다운 누드로 묘사했으며, 도나텔로는 중세 이후 처음으로 전신 누드 조각상 「다윗 David」(1430년~1432년)을 제작했습니다.

앳된 소년 모습을 한 「다윗」은 당시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중세 시대라면 이러한 조상은 우상 숭배라는 비난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르네상스 조각은 미켈란젤로에서 정점에 도달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16세기에 들어서자마자 피렌체 시의 주문으로 「다윗」(1501년)을 제작하고, 교황 율리우스 2세 묘소를 장식하기 위해 「모세」(1513년~1515년)를 제작했습니다. 당시 피렌체 시청사로 사용한 베키오 궁전 앞에 설치한 높이 4미터의 다윗 상과 위엄과 힘이 넘치는 장년 남성으로 묘사된 모세에서 전성기 르네상스의 자신감을 읽을 수 있습니다.

 

중세 그림이나 조각에서 고행을 하거나 근엄한 모습으로 묘사된 예언자, 사도, 순교자, 성자들이 르네상스 미술에서는 힘과 위엄이 충만한 숭고한 인간이자 육감적 아름다움까지 겸비한 인물로 형상화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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