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가
중세까지는 오늘날과 같은 의미에서 문학가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문학가는 르네상스 시대의 산물이며, 르네상스 시대로 접어들 무렵 ‘듣는’ 문학은 ‘읽는’ 문학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모임에 청중으로 참가하여 시인이 낭송하는 노래를 듣는 식으로 이루어지던 공동체적 소비는 서재에서 혼자 책을 읽는 개인적 소비로 바뀌었습니다. 개인적 독서가 처음 나타난 것은 13세기이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그것이 주된 독서방식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에 따라 시인은 자기가 지은 시에 곡을 붙여 노래하는 음악가가 아니라, 책을 쓰는 문학가로 되었고 문학가와 음악가는 분리되었습니다.
두 피렌체 사람이 르네상스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한쪽 발은 아직 중세에 들여놓고 다른 발로는 르네상스의 떠오르는 별을 맞이하고 있던’ 단테(Alighieri Dante)는 르네상스 문학가의 원형입니다. 그는 베아트리체에 대한 초월적 사랑을 운문과 산문이 혼합된 작품집 「신생」(1293년경)에 남겼습니다. 베아트리체는 「신곡」(1321년)에서 하늘의 사람으로 지고한 아름다움과 진리의 화신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단테 뒤를 이은 위대한 시인은 페트라르카입니다. 역사가들은 그를 최초의 근대인이라고 부르며, 그는 또 최초의 근대 문학가입니다. 그는 직업 작가로서, 이 궁정 저 궁정 돌아다니면서 자신을 찬미하는 사람들의 아첨을 즐겼습니다. 시를 애호하는 계층은 제한되어 있었지만 인문주의자로서 시인의 지위는 대단히 높았습니다.
출신에 따라 다른 대우를 받았던 중세 음유시인과 달리 르네상스 시인들은 모두 인문주의 지식인으로서 높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1341년에 페트라르카는 로마의 캄피돌리오 언덕에서 계관시인으로 추대되는데, 그가 월계관을 쓴 일은 시인의 지위가 고대 그리스 시대로 복권되는 신호였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여러 궁정에서 활동하던 시인은 개인적인 창작 욕구에 의거해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후원자의 주문이 있으면 지체 없이 정해진 규칙에 따라 인위적으로 시를 제조해 내는 존재였습니다. 이들의 시는 후원자에게 친숙한 주제인 궁정식 사랑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14세기 프랑스 시인 데샹(Eustache Deschamps)은 시인이자 음악가인 마쇼의 제자입니다. 마쇼는 시와 음악을 동시에 했지만 데샹의 시대에는 시와 음악이 분리되었고, 데샹은 프랑스 왕과 오를레앙 공작의 궁정에서 서정시를 쓰면서 살았는데, 후원자가 주문하는 대로 쉴 새 없이 시를 쓰다 보니, 약 80,000행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시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책이 등장하고, 듣는 문학이 읽는 문학으로 바뀌면서 르네상스 시대에 처음으로 산문작가가 등장했다.
산문작가인 보카초(Giovanni Boccaccio), 라블레(Francois Rabelais),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Saavedra)는 시인보다 더 큰 대중적 인기를 누렸지만, 시인과는 달리 한결같이 귀한 대접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음악가
중세 말 시작된 시인과 음악가의 분화가 진전되면서 음악가는 시인과 구별되는 직업인이 되었습니다.
미술가처럼 음악가의 지위도 향상되었는데, 음악가의 중요한 후원자는 중세와 마찬가지로 교회이지만 세속 궁정의 후원도 크게 늘었습니다. 왕과 귀족은 훌륭한 작곡가나 연주자를 고용하려고 경쟁했고, 궁정 예배당 단원은 조건에 따라 이리 저리 이동했으며, 음악가는 전에 없이 좋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15세기 부르고뉴 공국을 통치한 선량공 필리프는 음악 후원자로서 유럽 전체에 명성을 떨쳤습니다. 부르고뉴 궁정 예배당은 15명에서 27명까지 음악가를 고용하고 있었는데, 그 명성이 높아 유럽 각지의 다른 예배당에 있는 많은 음악가들은 언젠가 그곳에서 일하고 싶어 했다고 합니다.
플랑드르 지방에 있던 부르고뉴 공국의 궁정은 뒤페(Guilaume Dufay)를 비롯하여 뛰어난 음악가를 많이 배출했습니다.
플랑드르 악파로 불린 이들 음악가는 16세기에 음악 중심지로 부상한 이탈리아 음악을 주도했습니다. 이탈리아 음악창작의 산실인 베네치아 성 마르코(San Marco) 성당은 16세기 후반까지 플랑드르 출신 작곡가에게만 곡을 맡겼습니다. 1436년 피렌체 성당이 완공되었을 때 뒤페가 헌당식 기념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중세에는 다성음악으로 된 교회음악을 몇 명의 독창자가 불렀지만 르네상스 시대에는 남성으로 구성된 합창단이 불렀습니다. 르네상스 말 이탈리아 일부 궁정에는 여가수가 등장하는데, 조스캥 데프레(Josquin des Prez)는 동시대인으로부터 ‘음악의 왕’이라는 칭송을 받았으며 미술에서 미켈란젤로에 필적하는 존경을 받았습니다.
조스캥 데프레는 예술적 자부심이 대단했지만 미켈란젤로와 마찬가지로 개인주의적 제작 태도 때문에 후원자와 불화를 일으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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