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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에 대하여(1)[미술가]

by 미스티스테이션 2023.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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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르네상스 예술가

 

예술생산자의 측면에서 보면 르네상스는 세속 예술가가 주도권을 확립한 시기입니다. 중세 예술생산의 큰 몫을 담당한 수도원과 교회 부속 공방의 예술가는 역할이 미미해졌습니다.

미술은 길드에 소속된 장인 미술가가 생산을 주도했으며, 문학과 음악은 귀족의 궁정을 중심으로 세속 시인과 직업 작곡가가 주도했습니다. 예술가의 사회적 지위는 공연예술가를 제외하면 중세보다 전반적으로 향상되었는데, 미술과 음악이 대부분 이름 없는 작가의 작품이던 상황이 사라진 것도 이 시대에 일어난 일입니다.

미술가의 개성이 석공 막사(lodge)의 익명성 속에 묻혀버렸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우리는 이름뿐만 아니라 뚜렷한 개인적 양식으로 작가를 가릴 수 있는 시대로 들어서면서 이제부터 미술사학자들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이름들로 자신의 책을 채울 수 있게 됩니다.

 

미술가

르네상스 시대는 미술가의 전문화가 진전된 시기입니다. 미술가는 화가, 조각가, 건축가로 분리되었는데, 14세기경부터 화가나 조각가들은 건축공사 현장이 아닌 자신의 공방에서 독립적으로 작업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석공길드에서 떨어져 나와 각자 길드를 조직했습니다. 미술가의 분화는 중세 말 시작했는데 그것은 도시 예술수요 증대와 관련이 있습니다.

 

부유한 시민들은 자신들도 교회에 무엇인가 기증하고 싶어 했는데, 그들이 주문한 것은 주로 성당의 감실이나 제단을 장식할 그림, 조각 같은 작은 예술작품이었습니다. 주문이 많아지자 일부 화가와 조각가는 건축현장의 공동작업장을 벗어나 독립적인 공방을 열고 미술품을 제작했고, 이들은 석공길드에서 벗어났으나 중세의 경제구조상 길드에 속하지 않고 일할 수 없기 때문에 비슷한 직종의 길드에 편입해 일했습니다.

 

이를테면 조각가는 목공 조합에, 화가는 약종상 조합에 속했다. 새로 결성된 화가나 조각가 길드도 규약이 많았지만, 위계적 질서 속에서 공동으로 작업하는 석공길드에 속해 있을 때보다는 독립적으로 일할 수 있었습니다.

미술가의 지위는 르네상스 시대에 놀라운 변화를 보였는데, 15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미술가는 여전히 미천한 장인이었습니다. 말단 관리에 지나지 않던 미켈란 젤로 아버지는 아들이 미술가가 되려고 하자 극구 반대했습니다.

 

미술가는 출신 성분이나 교육 수준이나 다른 길드에서 일하는 장인과 차이가 없었습니다. 미술가의 보수는 다른 기술자에 비하면 그다지 적지 않았지만 문인이나 학자에 비하면 훨씬 적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후원자로부터 보수를 제대로 못 받았다고 여러 차례 불평했으나, 도시귀족과 부유한 상인이 미술수요자로 등장하면서 미술가의 경제적 지위는 개선되었습니다.

 

15세기말 로마 교황청이 피렌체의 세속 후원자들과 경쟁을 벌이면서 거장 미술가들의 보수를 높여놓으므로서, 교황청이 제시한 높은 보수에 이끌려 많은 미술가가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향했습니다. 피렌체의 도시귀족은 이들을 붙잡아 두기 위해 보수를 더 높였다고 합니다.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예배당 벽화를 그려주고 3,000 두카스를 받았습니다. 당시 피렌체에서 300 두카스만 있으면 일 년을 귀족처럼 호화롭게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미술가들은 일거리와 보다 나은 보수를 따라 이 도시, 저 궁정으로 옮겨 다녔는데, 일단 특정 후원자에 고용되면 수입은 비교적 안정되지만 마음대로 여행할 자유와 다른 후원자의 주문을 받을 자유가 제한되었습니다.

 

16세기 초 몇몇 거장 미술가는 더 이상 후원자의 보호 아래 있지 않고 그들과 대등한 사회적 지위를 누렸습니다. 라피엘로와 티치아노(Tiziano Vecellio)는 궁궐 같은 저택에서 살면서 왕, 귀족, 추기경과 교제했습니다. 라파엘로는 추기경의 조카딸을 아내로 맞았으며, 티치아노는 프랑수아(Fransois) 1세(1515년~1547년 재위)를 자기 집 손님으로 접대했습니다.

 

미술가의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은 그들의 작품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화가들은 자신의 그림에 서명하기 시작했고, 그림 속에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었습니다. 라파엘로는 바티칸 궁전의 「아테네 학당」(1511년)에 자기 모습을 그려 넣었고,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예배당 벽화 「최후의 심판」(1541년)에서 가죽 벗기는 형을 받고 죽은 성 바르톨로메오의 얼굴 가죽에 자화상을 그려 넣었습니다. 이는 미술가들이 스스로를 그림 속의 위대한 학자나 성인과 대등한 존재로 인식하게 된 증거이기도 합니다.

 

부르고뉴 공국의 선량공 필리프 밑에서 궁정화가로 일한 에이크(Jan van Eyck)도 학식 있는 거장으로 자처하고 플랑드르 미술가로는 처음으로 자기 작품에 당당하게 서명했습니다. 그가 그린 몇 작품에는 ‘최선을 다해’라는 그의 오만한 좌우명이 들어 있습니다. 미술수요의 증대는 미술가의 지위뿐만 아니라 생산조직의 변화도 초래했는데, 미술가들은 중세 시대에 길드에 소속된 이후 줄곧 길드의 규제를 받았습니다.

 

길드는 특정 도시의 예술생산을 독점하고, 장기간 도제수업을 거친 장인에게만 미술가로 일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습니다. 길드는 원래 생산자가 공급과잉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수요에 맞춰 공급을 조절하는데 목적이 있었는데, 미술수요가 증가하여 공급과잉 염려가 없어지자 길드 규제도 느슨해지게 됩니다.

화가들은 일거리를 따라 이 도시 저 도시로 옮겨 다녔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 시대가 저무는 16세기 말 길드는 공식적으로 종료를 선언하게 되는데 이는 1590년 길드가 정한 7년의 도제 기간을 거치지 않은 제노바의 한 화가가 길드를 상대로 벌인 소송에서 길드의 규정은 더 이상 구속력이 없다는 판결이 내려졌기 때문입니다.

 

그 후 길드의 교육 기능은 아카데미로 이전되며, 16세기 후반 설립된 아카데미아 디산루카, 아카데미아 델디세뇨에서는 인문주의적 교양을 결합한 미술 교육을 실시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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