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공동체
기원전 6세기, 그리스에서는 시민이 빚 때문에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시민과 노예의 신분적 차이가 확실해지고 시민공동체가 확립되었습니다.
기원전 510년에는 모든 시민이 직접 정치와 행정에 참여하는 직접 민주주의가 수립되었는데, 시민이라면 누구나 능력과 재산에 상관없이 정치에 참여하고 관직에 선임될 수 있었습니다. 시민이 참여하는 민회는 1년에 40회 이상 집회를 개최했으며, 노예, 거류 외인, 여성, 미성년자는 시민이 아니므로 정치에 참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시민생활은 ‘국가와 개인의 합일’에 입각했습니다. 그리스의 사회생활에서 개인주의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고 도시국가는 공동체 사회였으며, 사생활은 국가에 의해 제약되었다고 합니다. 많은 도시국가에서는 남자가 독신으로 사는 것을 금지했고, 스파르타에서는 결혼이 늦은 사람도 처벌했으며 교육도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스파르타에서는 아버지가 자식을 교육할 권리가 아예 없었고, 아테네도 국가가 통일된 교육을 실시했습니다. 신앙의 자유도 없었고, 시민은 도시의 수호신을 믿어야 했습니다. 소크라테스(Socrates)는 도시의 신앙에 회의를 품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습니다.
스파르타의 시민생활은 국가와 개인의 일체화가 극단적으로 진전된 예 입니다. 스파르타 시민은 일곱 살이 되면 부모를 떠나 공동생활을 하고 18세부터 30세까지 병영에서 생활했으며, 30세가 되면 집으로 돌아갔으나 저녁식사는 식량을 지참하여 동료와 공동으로 하는 것이 의무였다고 합니다. 5세기까지 군대는 시민으로 이루어졌으며 직업군인은 없었습니다.
전쟁은 정치, 스포츠, 예술과 더불어 고대사회 유한계급의 일상 활동이었습니다. 고대 고전예술이 개화한 기원전 5세기만 하더라도 아테네는 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92년~479년),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년~404년)이라는 두 차례의 긴 전쟁을 치렀습니다.
시민이 전쟁에 나가는 것은 도시국가를 위한 일이자 자신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전쟁에 지면 모두 노예가 되기 때문에 도시국가 시민은 같이 죽고 같이 사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통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전사자의 어머니는 명랑한 얼굴로 사람을 대하고 반대로 자식이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어머니는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일이 가능했습니다.
평화시에 시민은 생산 활동을 노예와 거류외인에게 맡기고 여가를 즐겼다고 합니다.
경제활동에서 면제된 시민은 정치, 스포츠, 예술 활동에 종사했으며 이들은 보수를 받는 직업 예술가와 구별되는 아마추어 예술가 층을 형성했습니다. 교육받은 그리스 시민은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를 줄 알았으며 화음 이론에 대해 토론할 수 있었으나, 예술에 대한 개인적 수요는 크지 않았다고 합니다.
무역을 통해 얻어진 부는 시민 개인에게 귀속되지 않았고 따라서 시민 개인은 예술의 수요자가 될 만큼 유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리스의 고전 예술은 도시국가 전체의 경제발전에 기반을 두었으며 예술수요자는 개인이 아닌 시민공동체였습니다. 그리스에서 거의 모든 예술은 집단적으로 소비되었다 합니다. 대표적 예술장르인 연극과 건축은 도시국가의 공동체적 예술수요를 충족시켰고, 연극은 단순한 여흥이 아니라 종교적 축제에 포함된 행사였습니다.
정치지도자 페리클레스(Pericles)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아크로폴리스를 대대적으로 재건하고 파르테논 신전을 건축한 것은 도시국가 아테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였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