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고대 예술에 대하여
고대 그리스에서는 예술수요자가 시민 공동체이므로 예술도 공동체적 성격을 지닌 장르가 발달했습니다.
미술 분야에서는 신전, 야외극장, 경기장 같은 공공 건축이 발전했고, 연극은 시민 공동체의 종교 축제로서 발전했습니다.
미술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융성한 미술 장르는 건축입니다.
고대 건축은 조각과 회화가 한데 어우러진 종합예술이었습니다. 건축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의 하나로 꼽히는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언덕은 시민 공동체의 종교, 정치활동의 중심지로 신전, 행정기관, 도서관, 극장이 모여있었습니다.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는 전성기를 맞게 되는데, 아테네 의 실권자 페리클레스는 전쟁 중 파괴된 아크로폴리스의 재건사업을 계획했습니다. 페리클레스는 공동방위를 위해 동맹국들이 모은 기금까지 축내면서 파르테논 신전, 에렉테움 등 그리스에서 가장 크고 호화로운 건물들을 세웠습니다.
흰 대리석으로 된 직육면체형의 파르테논 신전은 기원전 447년 착공되어 건물 본체는 기원전 438년에 완성되었습니다.
조각가 페이디아스는 건축을 총 감독했으며 금과 상아로 거대한 아테나 여신상을 조각하여 신전 내부에 설치했습니다.
파르테논 신전은 그리스 건축의 세 가지 오더 중 가장 단순한 도리아식 오더(doric order)를 최고로 발전시킨 걸작으로 ‘단순함 속의 아름다움’이라는 고전 예술의 이상을 구현했습니다. 이 건물의 치밀함은 착시효과를 고려하여 수학적 규칙성에서 약간 벗어나는 방법으로 시각상의 정확성을 실현한 데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즉, 기단은 끝으로 갈수록 위쪽으로 굽어 있고, 기둥은 위로 갈수록 지름을 줄여 볼록하게 하는 배흘림(entasis)을 사용했습니다.
네 귀퉁이의 기둥은 하늘을 배경으로 보았을 때 가늘어 보이는 현상을 보정하기 위해 조금 굵게 만들었으며, 신전을 장식한 조각은 건축물과 세심한 조화를 이루도록 고려했습니다.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은 신과 아테네 시민의 생활상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아놓은 백과사전과 같습니다. 신전 내부에 있는 신상 아치소(cella)의 외벽은 폭 1 미터의 프리즈(frieze, 장식띠)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총길이 153 미터에 달하는 프리즈에는 아테네 대축제에 참가한 시민들과 신들이 저부조로 새겨져 있습니다.
600명이나 되는 시민의 모습을 새겨 넣은 것은 그리스 사회가 시민공동체를 얼마나 중시했는지 말해줍니다. 신전, 야외극장 같은 공공건물을 공들여 치장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일반 시민의 주거는 몹시 소박했습니다. 시민들은 돌로 된 기초에 벽돌로 지은 소박한 가옥에 살았는데, 지붕은 기와로 이었으며, 바닥은 회반죽이나 다진 흙으로 되어있습니다. 벽에는 아무 장식도, 창문도 없습니다. 그리스에서는 도둑을 ‘벽을 파는 사람’으로 불렀는데 집안으로 침입하려면 창문이 없는 벽을 파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스 고전시대의 미술작품에서는 균형과 조화가 추구되었습니다. 전체와 부분의 조화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것은, 공동체를 우선시하고 국가와 개인의 합일을 중시하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의식과 사회이념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연극
건축과 더불어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 예술은 연극입니다. 건축과 마찬가지로 연극도 공동체적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그리스 연극은 서사시의 낭송에서 시작하여 시, 음악, 무용이 결합된 종합예술로 발전했습니다. 연극은 술의 신 디오니소스를 기리는 종교적 축제에서 비롯되었는데,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시작되는 기원전 6세기경, 그리스 민족이 전부터 촌락 단위로 열어온 디오니 소스 축제가 도시국가의 공식 축제로 자리 잡게 됩니다.
축제가 열리면 시민들은 온통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다른 도시에서도 방문객이 모여들었습니다. 축제에서 「오디세이아」를 비롯한 서사시가 관례적으로 낭송되었습니다. 처음에는 15명 정도의 남자들이 무리 지어 춤을 추며 서사시를 읊었는데, 차츰 무리 가운데 한 명이 빠져나와 좀 더 긴 대사를 읊게 되었습니다.
대사는 춤이나 노래보다 점점 중요해져 연극으로 발전했으며 연극은 국가가 주도했다고 합니다. 기원전 6세기 정치지도자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가 상을 내걸고 연극 경연대회를 개최한 이래, 아테네의 정치가들은 연극공연을 국가적 행사로 지원했습니다.
국가는 극장 건설, 연극 기획과 공연, 최우수 극작가 시상에 이르기까지 모든 축제 과정을 주도하고,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세워진 디오니소스 극장을 비롯해 도처에 건설된 야외극장은 시민의 유대를 다지고 이들의 지지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거대한 정치선전 시설이었습니다.
객석 규모는 에피다우로스 극장이 13,000석, 아테네의 디오니소스 극장이 18,000석으로 거의 모든 시민이 공연을 구경할 수 있었다 합니다. 국가는 축제에서 상연할 연극을 기획하고 극작가와 배우에게 급여를 지급했으며, 연극을 담당하는 행정관이 따로 있어서 축제가 열리기 11개월 전에 공연작품을 선정했습니다.
매년 열리는 축제에 참가 자격을 얻은 시인은 보통 3부작(3편의 비극) 혹은 4부작(3편의 비극과 한편의 사티로스극)을 출품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 연극은 한편이 짧기 때문에, 4부작이라 해도 그 길이는 오늘날 희곡 한편보다 길지 않았다고 합니다.
작품이 선정된 작가에게는 오늘날 제작자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부유한 시민 후원자(choregus)를 한 명씩 정해 주었습니다. 이들 지정 후원자는 의상 구입을 비롯하여 공연 준비에 필요한 비용을 제공했으며, 축제가 끝난 후 국가는 심사위원을 지명하여 공연된 작품을 심사하게 하고 우승한 극작가에게 상을 수여했습니다.
디오니소스 축제는 보통 봄이 시작되는 3월 말 일주일가량 개최되었고, 이 기간은 공식 휴일이어서 행정업무와 상거래를 포함한 아테네의 모든 일상 업무가 중단되었다고 합니다. 축제가 시작되면 처음 하루 이틀 동안 도시 전체를 도는 퍼레이드가 열리고. 그 가운데 연극의 예고편이 공연되었습니다.
나머지 닷새 동안 디오니소스 신에 대한 제사가 치러지는데 무대 공연도 이 때 행해졌습니다. 닷새 중 이틀은 여럿이 무대에서 춤추며 노래하는 합창(dithyramb)이 공연되었고, 연극은 마지막 사흘 동안 공연되었습니다.
합창무용단은 연극 공연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12명 내지 15명으로 이루어진 합창무용단은 객석과 무대 사이의 원형 공간에 위치했는데 이 공간을 ‘오케스트라’라 불렸습니다.
연극은 한 작가가 쓴 세 편의 비극을 3부작으로 공연하거나 세 편의 비극과 한 편의 사티로스극을 묶어서 4부작으로 공연했습니다. 익살극인 사티로스극은 기원전 486년부터 추가되었으며 같은 해에 희극 공연도 시작되었습니다. 희극은 각기 다른 작가가 쓴 작품을 닷새 동안 매일 한 편씩 공연했습니다. 연극은 노예나 거류외인도 관람할 수 있었지만 관객은 대부분 시민이었습니다. 기원전 5세기부터 입장료를 받았으나 매우 저렴하여서 시민이면 누구나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다.
하여 시민들은 일년에 한 번 있는 축제를 손꼽아 기다렸다 합니다. 축제가 끝나면 무대에 올려진 연극의 주제, 사상, 논점을 두고 열띤 토론과 논쟁이 계속되었고, 극장에서 품위 없는 행동을 한 사람은 축제가 끝난 후 재판을 거쳐 처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야외극장에서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거나, 술에 취해 채찍으로 남을 친 사람은 심한 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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