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고대 그리스에서 직업 시인 겸 음악가가 처음 등장했습니다. 그리스 시인은 반주에 맞춰 스스로 지은 시를 노래하는 음악가이기도 했는데, 음유시인은 일반 사람에게는 경외의 대상이었으나, 사회적 위계구조 내에서 고정된 지위를 갖지 않았다고 합니다. 음유시인은 자유 직업인이며 한편으로는 방랑하는 거지였습니다.
이름이 알려진 최초의 음유시인 호메로스가 흔히 장님으로 묘사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즉 시인은 한편으로는 내면을 통찰하는 안목을 소유한 존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보통 사람과 유리된 존재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리스 문화의 전성기인 기원전 5세기에 이르러 시인의 지위가 상당히 변했습니다. 비극작가 소포클레스(Sophokles)는 눈먼 거지가 아니라 훌륭한 장군이며 사제이자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모든 면에서 이상적인 그리스인으로 존경을 받았고 「오이디푸스왕」을 비롯한 123편의 뛰어난 연극작품을 썼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시가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라고 주장하며 시인에 대한 존경을 고취했습니다. 그리스 연극은 아이스킬로스(Aeschylos),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Euripides)로 이어지는 3대 비극작가와 위대한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에 의해 기원전 5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미술가의 일은 육체노동으로 천시되었으나 시인의 일은 정신노동으로 간주되어 대우를 받았습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미술가는 영감과 전혀 관계가 없지만 시인에게는 신적 영감이 존재했습니다. 시인은 지식인으로 여겨져 노예일지라도 빈객 대우를 받았습니다. 로마의 희극작가 테렌티우스(Terentius)는 카르타고 출신 오예였으나 당대 최고 지식인들이 모인 문학 서클에 참가했고, 그의 작품은 교양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애호되었다고 합니다.
배우
기원전 6세기경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연극이 발전하면서 전문 배우가 나타났습니다.
테스피스(Thespis)는 비극의 창시자이자 최초의 배우로 기원전 534년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상을 탄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합창무용단의 일원이었으나 혼자 무대에 올라가 합창단의 지도자와 대사를 주고받는 역할을 처음으로 했고 이것이 곧 그리스 연극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리스 비극은 원형 노천극장에서 공연되었습니다. 배우는 가면을 쓰고 자수로 장식된 밝은 색깔의 긴 옷을 입고 밑창 달린 높은 신발을 신어 키를 커 보이게 했습니다. 이런 복장을 한 배우는 위엄 있게 보여서 비극이 지닌 장엄한 분위기를 돋우었으나 배우가 이런 차림으로 연기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가면은 얼굴 표정을 나타낼 수 없게 했고 속을 채워 넣은 긴 의상과 높은 구두는 동작을 방해했습니다. 말하자면 배우는 합창 사이사이에 들어있는 대사를 낭송하는 성우 같은 존재였다고 합니다.
처음에 한 명뿐이던 등장인물은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에서 두 명으로, 소포클레스의 비극에서 세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이후 비극의 등장인물은 세 명으로 고정되었습니다. 극 중 역할이 세 명 이상이면 한 배우가 여러 역을 맡았다고 합니다.
희극에서는 한 장면에 배우가 세 명 이상 등장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배우가 한 사람이면 족한 초기에는 대개 극작가 자신이 배우로 출연했다고 합니다.
소포클레스에 이르러 비로소 전문 배우가 역할을 맡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축제에서 공연되는 연극에 참가하는 배우는 국가로부터 보수를 받았지만 액수가 얼마 되지 않아 그 일만으로 살아가기는 불가능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그리스에서 엄밀한 의미의 직업 배우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헬레니즘 시대(기원전 336년~146년)에 연극계의 중심은 극작가에서 배우로 이동했다. 이 시기에는 디오니소스 축제 외에도 전쟁의 승리 같은 국가적 경사를 이념 하는 축제가 많아져 연극 공연이 활발했습니다.
공연이 많으니 배우에 대한 수요도 커지고 직업 배우의 수도 증가했는데, 그 결과, 기원전 227년에는 디오니소스 예술단이라는 일종의 배우조합이 탄생하게 됩니다. 이 조합에는 배우를 비롯하여 합창무용단 단원, 극작작가 참가했습니다. 배우가 연극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컸지만 이들의 사회적 지위는 낮았습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배우는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존재이며 자신이 주장한 이상국가에 들여놓을 수 없는 존재로 규정합니다. 배우에 대한 나쁜 인식은 헬레니즘 시대에 더욱 퍼져서 배우들은 대부분 이름 없는 존재로 남았습니다.
고대 로마에서도 배우의 사회적 지위는 여전히 낮았고 종종 노예로 충원되었다. 괴상한 짓을 많이 했던 로마 황제 네로(Nero Claudius Caesar Augustus, 기원후 54년~68년 재위)는 여장을 하고 직접 무대에 서기도 했으나 실제로는 로마 시대에 연극계에 발을 들여놓으면 시민권을 상실했다고 합니다.
고대 예술가의 지위
그리스 고전시대에 활동한 예술가의 지위에 관해서 세 가지 특징을 들 수 있습니다. 근대사회가 형성되기 전까지 전근대 예술가는 이러한 특징을 전반적으로 공유했습니다.
첫째 특징은 예술생산자와 예술수요자의 지위 격차입니다. 예술가는 노동계급으로 사회적 지위가 낮지만 예술수요자는 유한계급으로 지위가 높습니다. 예술가는 시민 공동체의 후원을 받아 작품을 생산하거나, 그들에게 고용되어 작품을 생산했습니다.
그리스 고전시대에 일부 예술가가 높은 명성을 누리면서 예술가를 천시하는 사회적 인식이 다소간 변화되고 예술가의 생애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전해진 일화에 따르면 일부 뛰어난 예술가들은 최고 권력자의 측근으로서 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면서 직업적 자부심을 키웠습니다.
고대를 재발견하고 숭상한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와 후원자는 이러한 일화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르네상스 예술가의 전기에는 그것을 모방한 일화가 자주 등장하지만, 이렇게 높은 대우를 받은 예술가는 극소수에 불과하고 고대 예술가의 일반적인 지위는 그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둘째 특징은 예술생산자와 예술작품의 분리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예술작품은 존중받았지만 그것을 제작한 예술가는 천대받았습니다. 이런 사실은 세이렌의 이야기에서도 상징적으로 나타나는데, 세이렌의 노래는 사람을 미혹할 정도로 아름답지만, 그것을 노래하는 세이렌 자매는 인간에 해를 끼치는 나쁜 존재입니다.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에게 가까이 가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몸을 돛대에 묶어달라고 합니다. 예술작품을 즐기면서도 예술가를 멀리하고 그의 유혹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리스 시민은 예술가와 예술작품을 분리해 생각함으로써 육체노동을 멸시하고 육체노동의 산물인 예술작품을 존중하는 모순을 해소하고자 했습니다.
셋째 특징은 예술가 내부의 지위 격차이다. 머리를 사용하는 시인은 존중을 받았지만 손발을 쓰는 미술가와 배우는 천시되었습니다. 이것은 전근대 사회에 퍼져있는 육체노동 천시와 연관되는데, 그리스 시대에 문학은 미술이나 공연예술과 완전히 다른 범주였습니다.
미술은 공연술·직조술·의술·웅변술·항해술·전투술 같은 실용적 장인 기술과 함께 기예(기예는 그리스어 테크네 techne로 라틴어에서 아르스 ars로 번역되었음. 기술 technique과 예술 art의 어원이 된 말)의 범주에 속했습니다. 고대 예술가에 관한 일화를 전하는 플리니우스(Gaius Plinius Secundus)의 「박물지」(기원후 77경)에서도 미술가는 장인과 동일하게 취급되었습니다.
「박물지」의 끝 부분인 제33-37권은 로마의 장인들이 사용하던 광석 및 금속을 다루고 있는데, 이 부분에 유명한 미술가와 그들의 작품에 관한 언급이 들어있습니다. 기원전 4세기 그리스의 의사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을 남겼는데 여기서 예술은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예술이 아니라 기예, 구체적으로는 의술을 말합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미술은 다른 기술과 구분되지 않았고, 시인과 미술가를 포괄하여 지칭하는 예술가 개념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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