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고대 예술가
오늘날에는 예술가들이 개인적으로 예술작업에 종사하고 예술작품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과 독창성을 형상화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예술생산은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고대 그리스를 대표하는 예술가는 신전 건축에 종사한 미술가와 연극 축제에 참여한 극작가, 배우였습니다.
이들은 집단적으로 예술생산에 참여했기 때문에, 각자의 주관을 예술작품에 드러내기 어려웠고 그렇게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리스 예술가는 시민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으로 도시국가로부터 보수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술작품을 찬미했지만 그것을 만든 예술가 개인의 인격이나 개성에는 흥미를 갖지 않았습니다. 예술생산의 공동체적 성격은 그리스 사회만이 아니라 전근대사회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특징입니다. 중세에도 예술생산은 길드(guild)라는 공동체 조직이 담당했습니다.
예술가의 주관을 강조하는 개인주의 예술생산은 근대사회에 이르러서야 나타나게 됩니다.
미술가
그리스 신화에는 조각가 피그말리온(Pigmalion)을 비롯해 여러 예술가가 등장합니다. 역사에는 기원전 5세기 처음 이름이 알려진 미술가가 등장하는데 그는 조각가 페이디아스입니다.
페이디아스는 파르테논 신전을 포함한 아크로폴리스 언덕의 재건을 총 감독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정치지도자 페리클레스와 더불어 아테네의 보호자이자 대변자라고 단언했는데, 이처럼 높은 자부심은 이전의 이름 없는 미술가로서는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화가로서는 기원전 5세기말 제욱시스(Zeuxis)가 사실주의 화풍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한 그림 경영대회에서 그가 그린 포도송이를 진짜로 착각한 새들이 날아들어 쪼으려 했다는 일화, 그가 크로톤 섬의 다섯 처녀를 골라 가장 아름다운 부분만을 조합해서 최고의 미녀 헬레나를 그렸다는 일화 따위는 당시 사람들이 사실적 묘사를 중시했음을 말해줍니다. 기원전 4세기의 화가 아펠레스(Apelles)도 고대 문필가들에게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의 남아있는 작품은 없으나 위대한 화가로서 많은 전설을 남겼다. 그중 하나가 아펠레스와 또 다른 거장 프로토게네스(Protogenes) 사이에 벌어진 정교한 선 그리기 내기에 관한 것입니다.
아펠레스는 프로토게네스의 공방을 찾아갔다가 마침 주인이 자리에 없자 공방의 패널에 아주 섬세한 선을 그려놓고 나왔습니다. 집에 돌아온 프로토게네 스는 아펠레스가 방문했음을 알아채고 그가 그려둔 선 안에 더 가는 선을 한 줄 그린 후, 몸을 피했습니다. 아펠레스가 다시 나타나 그 안에 더욱더 가는 선을 그렸습니다. 프로토게네 스는 친구에게 자신이 졌음을 인정했습니다. 아펠레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궁정화가로서 영광을 누렸습니다. 페이디아스, 제욱시스, 아펠레스는 예외적인 대우를 받은 경우입니다. 그리스 미술가는 대부분 작품 배후의 어둠에 숨은 채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으며, 고대인은 미술가를 예술가가 아니라 기계적으로 작품을 만들어내는 기술자로 생각했습니다.
미술은 다른 장인적 기술과 구별되지 않았고, 미술가는 장인의 지위에 있었다. 조각이 벽돌 쌓기나 나무 다듬기보다 우월한 기술로 여겨지지 않았고, 조각가가 벽돌공이나 목공보다 낫다고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파르테논 신전을 세우고 예술적 부조와 문양을 아로새긴 미술가는 수많은 이름 없는 석공이었습니다. 그리스 시민에게 여가생활은 가치 있는 일이지만 노동활동은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이었습니다.
플라톤(Platon)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육체노동이 정신과 신체를 추악하게 만든다고 주장하면서 육체노동에 대한 멸시를 정당화했습니다. 시민은 노동으로 생활하는 사람을 경멸했으며, 육체노동을 노예에게 맡겼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고 건물을 짓는 일은 노예의 몫이었고, 고대사회에서 미술가, 특히 보수를 받고 일하는 미술가는 멸시를 당했습니다.
예술가로서 자부심이 높았던 제욱시스는 적당한 가격을 매길 수 없다는 이유로 그림을 거저 나누어주었습니다. 로마 예술의 황금기인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 황제 시대(기원전 43년~기원후 14년)에 회화를 애호하는 풍조가 널리 퍼졌는데 이때에도 화가는 보수를 받지 않을 때만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공한 화가는 일부러 작품의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고대의 예술수요자는 예술작품과 그것을 만든 사람을 분리시켜 육체노동에 대한 천시와 그 육체노동의 산물인 작품에 대한 존중 사이의 모순을 해소하려고 했습니다.
예술작품은 존중하지만 그것을 만든 예술가는 천시하는 것이 그리스 시민의 관점이었습니다. 작품이 아무리 아름답고 마음을 즐겁게 해도 그것을 만든 예술가를 본받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1세기경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Seneca)는 ‘사람들은 신상을 숭상하고 이에 희생을 바친다. 그러나 이 상을 만든 조각가는 멸시한다’고 했는데 이 말도 그러한 관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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